사람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각자 느낌이나 평가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알아가면서 가장 혜택보는 사람은 나 자신일 것이다. 그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세워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을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알아온 사람들 덕분에 내가 현재 이 상태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고 현재의 내 모습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사람을 아는 것일까? 이름과 나이, 고향 등만 알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사람의 직장, 수입, 가족 관계 등등 꼬치꼬치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일까?

오랜만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동안 연락을 못하던 친구인데 갑자기 문자를 보내서 자기 주변의 사람에게 소개시켜줄 적당한 사람 없냐는 것이다. 몇 가지 요구사항을 확인한 후에 괜찮은 사람이 있다고 답을 주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소개해주는 것도 좀 신중하게 해야할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학력, 직업, 사는 곳 등등을 알려달란다. 그런데 난 정작 그런 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잘 모르겠다고 확인해보겠다고 했더니 되려 나에게 잘 모르는 사람이냐고 되묻는다. 글쎄, 난 그 누나를 잘 모르는 것인가.

나는 사람을 사귈 때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겠지만 덜 중요한 것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사실 모르는 것이 더 좋은 때가 많지만---이라고 생각했다. 이 누나도 마찬가지다. 난 이 누나가 속에 품은 생각과 하는 행동, 말 등을 통해서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아무에게나 소개시켜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의 부탁때문에 조건을 맞추다 보니 이 누나가 나와서 이리저리 연결해 본 것인데 내가 누나의 직장을 모른다고 잘 모르는 사람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되니 좀 황당했다.

물론 상대의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결혼해야 하는 나이이다 보니 아무나 만나지 않으려는 것은 십분 이해하겠지만 좀 기분이 좋지 않다.

난 사람을 사귈 때 리스트를 써놓고 체크해가면서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 배울 점이 있다면 사귄다. 내가 배울 점이 없는 사람이란 없으니 항상 알게 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인위적으로 가지치기 따위는 하지 않았다. 떨어져나가는 사람은 그대로 두었고 가까이 머무르게 되면 서로 가까워지기를 원할 따름이다.

누군가 보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거나, 관심이 없다는 등의 지적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다른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부차적인 것까지 열심히 챙기다가는 가장 중요한 그것마저도 부차적인 것들과 섞이고 차이가 없게 될 수 있다. 안 그럴 수도 있다고? 난 내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 없다. 그래서 학력이나 직장, 수입 등의 정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알게 되면 사람을 알게되는 것에 도움이 많이 된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래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그리 큰 무게를 두지 않는다.

내게 있어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속사람에 대해 안다는 것이다. 다석 선생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며 사물은 하느님의 편지라 했다. 그 속을 보고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알라는 편지라고 했다. 사람을 사귄다는 것은 그 편지를 보고서 하느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난 그 누나에게서 나와는 너무 다른 의젓함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사귄다. 나의 부족함을 알게하기 때문이다. 학력이나 직업 등에 대해서 신경쓰는 것은 편지의 내용보다 봉투의 재질이나 우표의 가격에 신경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생각이 잘못된 것인지, 세상이 잘못된 것인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당부의 말
내 친구가 사람을 사귈 때 그런 이력을 보고 사귄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친구는 소개해주는 입장에서 이것저것 궁금해서 물은 것이고 난 그것에 대답하면서 내 사람 사귀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 친구도 분명 나와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 역시 사람의 됨됨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오해가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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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쓰는 글이다.

노트북을 전에 조금 싸게 구입했다. 어떤 것을 살까 고민하다가 결국 국내 기업인 삼보의 애버라텍 2500시리즈. 아마도 내가 산 것이 좀 2500 시리즈 중에서는 이른 모델일 것이다. 뒷면의 모델 확인해보니 2540. 음... 거의 재고 정리할 즈음에 산 듯하다.

다른 모델과의 차이가 있다면 하드 용량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사용하는 데 크게 불편함은 없다. 다만 비스타라고 하는 체제에 대한 막연한 불만 정도. 괜히 불편한 것이 좀 있는 것 같다.

여기서 하려는 이야기는 운영체제에 대한 불평이 아니라 노트북 배터리의 시간 문제이다. 2500시리즈는 노트북 크기도 작고 무게도 '그리' 무겁지 않다. 그래서 적당하겠거니 해서 샀는데 배터리가 영 꽝인듯 싶다. 100% 충전을 다해도 2시간을 못 버티는 듯 하다. 결국 아답터를 항상 달고 써야 한다는 점.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내 후배 중에는 삼성이었나 엘지였나 하여튼 대기업 노트북을 쓰는 친구가 있다. 요즘 듣는 수업이 대개 3시간 연강인데 내 노트북은 아답터 없이는 생각도 못할 수업을 이 친구는 충전해온 노트북 배터리 하나로 넉넉히 버티는 것이다. 음... 명함 값을 무턱대고 무시할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와서 그런 후배의 노트북을 보다 내 노트북을 생각하니 참 답답했다. 노트북은 자고로 이동성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런데 이건 어딜 가든지 안정적으로 사용하려면 아답터 들고 전기 콘센트를 찾아야하니 이건 노트북이 아니다. 더구나 크기도 작은 노트북이라서 집에서 데스크탑 대용으로 쓰기에도 좀 모자라는 이 노트북은 도대체 어찌하란 것인가.

추가 배터리를 구입하려고 해봤는데 삼보 홈페이지에서는 아직 서비스를 하지 않는 것 같다.결국 돈을 좀 더 쓰게 될 것 같다. 어디서 사야하나. 그리고 어떤 것을 사야하나. 이거야 원.

물건은 없을 때보다 있을 때 불편한(또는 불평할) 점이 더 많아진다는 생각이 든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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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혼란스럽다

세상아!
돈아!
기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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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생각해 온 문제이다. 내 행동 방향과 관련해서, 난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요즘도 여전히 혹은 요즘은 좀 조용히 촛불집회는 죽 이어져 오고 있다. 이미 한 달을 넘긴 긴 기간 동안 조용하기 어려웠던 시청 앞에 나갈까 말까 고민도 많았다. 그러나 아직 확신이 없는걸. 시험이네 약속이네 그것들을 무시하고 나갈 만큼 그 문제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나보다. 계속해서 고민이 되고 생각이 났다. 난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

처음에는 촛불을 든 사람들의 생각에 공감했다. 맞다! 정부의 이런 의사소통 방식은 문제가 있다! 이제 바야흐로 국민이 나서서 정부의 잘못을 지적해 줄 때다! 국회는 국민의 대변기관이기를 스스로 포기하였고 또 국민들도 그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나가자!

정부의 우려 섞인 말을 들을 때면 또 수긍이 되었다. 맞어, 지금 시절이 어찌나 어려운지, 이렇게 분란을 혼란을 가져 와도 되는 것일까? (문제의 경중을 떠나서)국제 유가도 오르고 있고 물가도 말도 못하고 제 자리로 돌아올 때도 된 것 같은데... 부모님 말씀대로 이만큼 했으면 된 것인가...

그런데 이런 생각의 꼬리를 잡고 떠오르는 생각.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싸우는 거지? 누가 국민들을 촛불을 켜게 했고, 누가 모든 권력의 근원인 국민들을 향해서 물대포를 쏘고 곤봉을, 방패를 휘두르게 한 것일까?

우습게도 우리들 모두라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을 켜고 나간 것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진압을 명령했을 때도 자신이 바른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난 못 가질 것 같다. 갖고 싶지도 않다. 난 상대방을 알 수 없다. 나 자신도 잘 모르겠는데 하물며 상대방을 이해하겠는가.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는데 그들의 생각을 어떻게 이해한다는 것인가. 결국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게 되는 것이다.

난 할 수 없다.

누군가 물을 수 있다. 그럼 정의는 무엇이냐. 옳은 것이 있긴 한 것이냐.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느냐.

이럴 때 이 시대의 깨달음의 빈곤이 아쉽다. 크게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알려 줄 수 있을 텐데. 예수께, 석가께, 노자에게, 공자에게, 장자, 맹자에게, 소크라테스에게, 간디에게, 톨스토이에게, 유영모에게 묻는다면 뭐라고 답을 할까? 어느 편을 들어 줄까?

내 짧은 생각에는 크게 꾸짖을 것 같다. 지금 먹고 사는 것 밖에 이야기하지 못하겠느냐고.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지만 이렇게 에너지를 소모해가면서 싸움박질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빵만 먹고 사는 존재로 몰락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먹고 사는데 말이다. 다시, 하느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것이지 무엇을 먹느냐, 누가 이기느냐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앞에 나열한 분들의 경지에서, 지극한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면 그렇지 않을까?

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더구나 현재의 문제 제기에 공감되지도 않는다.

난 계속 촛불을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반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부디 내 속의 불을 크게 살리길 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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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정부, 촛불
요즘 또 사람들을 시끌시끌하게 하는 것이 '용역 청년 VS 김밥 할머니' 싸움이다.

어제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20대 청년이 할머니를 두들겨 패다니. 발길질도 하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누 했다.

잠시 후에 23세라던 그 청년의 인터뷰를 보았다. 청년의 말 뿐이지만 싸우게 된 원인을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김밥 같은 거 팔면 안 된다고 했다는 청년. 그리고 약간의 말이 오고 가고 할머니의 마지막(?) 결정적인 발언.

넌 평생 용역이나 하고 살아라.

감정이 격해져 있었으니 더 심하게 했을 수도 있고, 청년이 심하게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 할머니도 할머니다. 23세 청년에게 악담을 해도 그런 악담을 하다니(용역에 근무하시는 분들을 깎아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 청년도 무슨 사정이 있어서인지 아르바이트로 그 용역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는데, 평생 용역이나 하고 살라니. 그 할머니도 분명 자기 손주가 그런 얘기 들었다면 당장 김밥 팔던 것 집어 치우고 싸우러 갈 것이다.

싸움은 원래 둘이 하는 것인데 자꾸 청년의 단독 잘못으로 몰아가는 것이 안타깝다. 그 할머니도 같이 법정에 세워야 한다. 물론 청년에게 더 큰 벌이 주어지겠지만, 할머니도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못하도록 법정에 세워야 한다. 청년에게 사과하여야 하고 청년도 할머니께 사죄하여야 한다.

난 그 청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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