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하게 되어 우리과 선생님들을 모시고 호암교수회관 파인 홀에서 조촐한 저녁식사 겸 사은회를 했다. 본래 사은회란 학생들이 단체로 모여 스승님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자리이지만 오늘은 우습게도 선생님은 모두 5분, 학생은 3명이 참가해서 아주 조촐한 자리가 되었다. 독어교육과가 사실 규모가 큰 과가 아니니, 이 부분은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식사를 천천히 하면서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우리 졸업생의 앞길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평상시 품고 있었던 이야기들, 선생님들께서도 바쁘셨는지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솔솔 오고 갔다.
식사를 다 마치고 차를 마시면서 있었던 이야기 중에서 흥미로웠던 말씀들.
- 조주선사에 대한 소개와 喫茶去
- 君子不器
'끽다거'를 '차나 마시고 가지'로 옮기신 한 선생님. 인생을 한 발자국 멈춰서 바라보는 여유와 그 속에서 깨달아지는 삶의 내용을 살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셨다.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에서 '그릇'의 의미를 '작은 그릇'으로, 이미 일찍 완성되어 버린 그릇--이러니 작은 그릇일 수밖에... 대기만성이라는 성어가 생각난다--으로 옮기시고, 이는 군자가 해야할 바가 아니라며 너무 일찍부터 무엇을 해야지라는 것에 대해 조바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권 선생님의 말씀.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나고서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알아들은 만큼 옮기고 있는 것이다. 혹,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
글쎄,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내 나이와 주변의 시선, 부모님에 대한 걱정 등으로 지금의 내가 미완성, 혹은 수준 미달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전해 듣는 소식이 누구는 어느 회사에 취업했다더라, 누구는 벌써 시집장가가서 애가 몇 살이라더라 등등이었으니 어느 것 하나 내세워 보여줄 것이 없는 나는 그들에게 보면 미완성이고 수준 미달의 대학생활을 한 것일 테다. 나도 스스로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들과 비교해보고 나 자신을 자꾸 재촉하기만 했던 것이다.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졸업을 맞는 소감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나는 두서없이 솔직하게 이야기 하였다.
"시간이 다 되어 쫓겨 나가면서 뒤돌아 보니, 대학 생활에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대학원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이게 과연 잘 하는 것인지 고민이 됩니다. 걱정스럽습니다."(대략의 요지다)
이제 짐을 좀 내려 놓아야겠다. 정확히 말하면 엄살을 그만 부려야겠다. 막상 시작도 하지 않았으면서 '어서 빨리 뭐든 되어야 해'라고 스스로 재촉하는 것은 아직 들지도 않은 짐을 보면서 '어서 빨리 저기에다 옮겨야 해' 하는 것과 같다. 이는 엄살이다. 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이 간단한 사실을 그동안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것은 '차 한 잔 마시는 여유'도 갖지 않은 내 마음의 괜시리 분주함 때문이었고, '작은 그릇'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메추라기와 부엉이(올빼미?)의 마음 때문이었다.
물론 이 과정이 큰 쓸모를 위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 매일 '여유가 가장 중요해, 난 작은 그릇이 아니야'라면서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것을 변명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여유가 없는 것이 더 좋을 지도 모른다. 쓸모 없음은 더 큰 쓸모를 위하는 것이다. 쓸모 없음 그 밖에 없다면 이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현재 난 목표를 나름대로 크게 세웠다. 선생님들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배고픈 길'이라고 하셨다. 주변 사람들이 보면 웃을 지도 모르지만 난 내 길, 그 길을 '꾸준히' 가련다. 그 길 위에서 가끔씩 차를 마시며 인생의 맛도 함께 보고 다시 길을 가고, 군자는 (작은) 그릇이 아니라고 했으니 무엇이 되는지 끝까지 가 봐야겠다.
***
내 글은 이렇게 교훈적인 분위기로 마무리 짓는 경우가 많다. 신변잡기를 이야기하면서도, 주제 넘게 세상을 이야기하면서도.
스스로 변명하니, 이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지금의 나에게는 꼭 필요한 생각이고 활동이다.
무엇을 딱 부러지게 판단해주고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일을 누가 쉽게 할 수 있을까? 가히 참사람이 되어야 할 수 있을 텐데 지금의 나는 참사람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다. 이런 내가 하는 말이 자기 반성과 자기 교훈 외에 다른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이야말로 기만이고 위선이다.
맞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옳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쓰는 문제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으니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저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항상 고민하고 싶습니다. 오늘 내일 바쁘게 사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하루라도 꽉 찬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 당장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요즘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공부한답시고 까불다가 이제 별다른 재주도 없이 내일 모레 30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보다 더 어린 사람이 이리저리 돈 벌었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립니다. 멀리 찾을 것 무엇입니까, 당장 제 동생도 자기 벌이는 하고 있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전 돈 벌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께 죄송해서 그렇습니다. 그간 초중고등학교 보내주시고 대학도 보내주셨는데 이제 곧 졸업이라지만 뚜렷한 미래를 보여드리지 못해서 죄송스럽습니다. 우리 부모님께서 제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부모님 생각에 꼭 필요한 것은 알고 계시니까요. 바로 돈입니다. 좀더 고상한 말로는 수입이요, 직장이죠.
이런 고민 때문에 다석 선생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하신걸까요? 적어도 농사를 지으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면 인생의 문제도 고민할 시간이 많아지겠죠.
그러나 농사는 아무나 한답니까, 제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몇 가지 짧은 지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전부인데요.
옛날에는 말 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능력이었다는 것 같은데 요즘은 또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 점수, 자격증 등이 부정할 수 없는 중요한 증명서가 되었죠. 그러고 보면 누구나 말 잘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세 치 혀로 세상을 누빈 공자, 맹자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도 석가모니도 포함되시겠어요. 다만 그 말이 우리의 말과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현재는 우리 고전문학을 공부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문학적 감성이 뛰어나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에요. 다만 현대의 것보다 옛날의 것이 더 좋기 때문이에요. 옛날 어른들이 뭐라고 생각하시고 말씀하셨는지 배우고 싶습니다. 완결되지 않은 원고라도 한 편 써보려면 그만큼 공부를 해야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세상이 하도 팍팍해져서 이런 것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더 잘 먹고 더 잘 입을까 하는 고민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게도 이런 바람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겠어요. 더 잘 먹고 잘 입는다면 저도 좋겠죠. 다만 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워 알기에 다만 속으로 앓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긴 하죠. 무엇이든 하긴 해야겠죠? 맘고생 심했던 과외도 끝냈으니 무슨 일이든 찾아야겠습니다.
오랜만에 재미 있게 잘 만든 영화를 보았다. 오우삼 감독이 제작한 <적벽대전2>가 그것인데, 이는 모두 알다시피 유명한 <삼국지연의>의 한 장면, 적벽대전 장면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이다. 원작이 유명하기 때문에, 보는 내내 내용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생각이 쏙쏙 들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보는 재미도 좋지만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것을 보면서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의 재미는 더욱 깊다. 이 영화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인 평이 '잘 만든'의 등급을 받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이다.
원작 소설과 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완전히 똑같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원작과 같지 않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불평을 피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보지 말고 원작 소설만 읽어야 할 것이다. 영화라는 갈래의 특성상 소설의 내용은 '취사 선택'된다. 원작의 모든 내용을 영화로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갈래의 특성, 상영시간, 갈등을 향한 보다 집중된 흐름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화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 이 부분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다. 그래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원작 소설이 작가의 것이라면 영화는 감독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사하지만 다른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감독은 원작에서 자신이 읽어내고 표현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서 관객과 소통한다. 이 과정은 영화 제작에서 필수불가결한 과정인 바 유사하지만 같지 않은 결과를 창출할 수 밖에 없다.
오우삼 감독이 <적벽대전> 시리즈에 선택하여 배치한 장면들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현실적인 적벽대전을 재구성하는 것을 의도하였던 것 같다. 적벽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거의 다 담았지만 아주 현실적인 다시 말해 현대적인 관점에서 개연성 있는 묘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결과 바람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천지신명께 기도하는 장면은 과감히 생략할 수 있었고, 몇몇 게임에서 그려지듯이 마법사 간달프 같은 제갈공명이 아니라 천지의 변화에 예민한 뛰어난 학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제갈공명을 그려내었다. 제갈공명이 뛰어난 지략가였다는 사실에 대해 토를 달지는 않겠지만, 알려진 제갈공명의 모습은 사실상 믿기 어려운 것이자 우스운 것이었다. 영화 <적벽대전>의 학자 제갈공명은 바람의 변화를 예측함에 있어 자신의 경험과 관측을 토대로 하여 현대인의 감각에도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이 결과 제갈공명의 활약이 크게 약화된 듯한 인상―<적벽대전>의 주인공은 주유가 분명할 것이다―을 주지만 현실성을 크게 살린 것은 분명하다.
영화가 태생적으로 근대적 갈래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가 합리성을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역행을 시도하는 실험적인 영화가 더욱 눈에 띈다. 그리고 원작이 있는 영화의 대체적인 경향으로 이 현대인의 시각에서의 합리성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텐데, 이 역시 근대적 갈래로서의 영화의 한 성격이 아닐까 생각한다.
잠시 다른 영화로 화제를 옮겨 <트로이>를 생각해 보자. <트로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재구성하여 할리우드의 감각으로 영화화한 것이다. <일리아스>는 뭇 신들과 뭇 영웅(반신)들이 등장하는 고대 헬라스의 세계관을 여실히 담고 있는 서사시이다. 영웅들의 언행은 헬라스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있고 모든 사건을 조정하는 신들의 모습에서 헬라스인들의 우주 질서를 엿볼 수 있다. 이와 달리 <트로이>에서는 모든 신의 개입을 생략해 버리고 오직 인간의 이야기만을 전한다. 신적인 존재'처럼' 그려지는 아켈레우스의 어머니 테튀스는 영화 속의 비중은 너무 작다. 오직 인간적인 감정과 인지가 모든 사건을 밀고 나아가는 추진력이 된다. 형이상학이 약화되고 모든 신과 종교는 제한된 영역만 차지하고 있고 오직 가시적인 물질과 감각적인 경험만이 인간을 이끌어 나가는 오늘의 현실과 유사한 세계가 그려지고 있다.
그 결과 <트로이>의 영웅의 모습과 <일리아스>의 영웅의 모습은 아주 다른 느낌을 준다. 모든 헬라스의 존경 받는 왕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돈만 밝히는 비열한 도적으로 전락하였고 헬라스 최고의 용사 아킬레우스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사춘기 소년―적어도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으로 강등되었다. 신의 혈통이 전하는 격조 있던 영웅의 모습이 더 이상 우리와 다를 것 없이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고귀함을 모르는 '인간'으로 변화하였다. (다만 트로이아 측의 영웅들은 호메로스가 그려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지적하여야 할 것이다.) 사랑 타령이나 하면서 죽어가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은 명예를 위해 싸우는 헬라스 최고의 용사의 모습과 너무도 그 사이가 멀다. 아킬레우스는 어떤 미덕을 전하는가? 불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현대화된 <적벽대전>은 다소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원작의 인물이 그대로 숨쉬고 있다. 유비 삼 형제, 제갈공명, 손권, 주유, 조조 등이 모두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현대화된 것은 <트로이>와 마찬가지이지만 원작에서 전하려고 하는 미덕들은 그대로 영화에 수용되었다. 뭇 영웅들이 그려내는 행동은 다소 가감이 있지만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덕목들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난세의 간웅(으로 그려지는) 조조에 맞서는 저항정신이었다. 원작에서도 조조에게 명분이 없음을 이유로 그에게 뭇 영웅들이 저항한다. <적벽대전>에서 수 만의 손권, 유비 동맹군과 수십 만의 조조 군의 격돌을 배경으로 마지막의 서로 목에 칼을 겨누고서 주유와 조조, 그 외 여러 영웅들이 주고 받는 대화는 비록 약하지만 옳지 않은 것에는 결코 굴복할 수 없고 또 옳지 않은 것은 비록 강하더라도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들이 현대의 관객들에게 전하는 바는 비단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느끼는 쾌감 뿐만 아니라 물질과 권력 등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좇아 가는 현대인들의 삶의 태도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제는 고전 원작의 인물 형상을 유지하면서 성취될 수 있었다. <트로이>가 현대화를 위해 원작의 주제를 변형한 경우라면, <적벽대전>은 원작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대에 유의미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현대화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트로이>의 주제를 위해서라면 굳이 <일리아스>가 선택될 필요가 없었지만, <적벽대전>의 주제를 위해서 <삼국지연의>를 소재로 끌어들인 것은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대개의 원작이 있는 영화는 실망을 많이 안겨주는 편이다. 원작에서 읽었던 장면이 내가 상상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해석되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영화 감독은 영화의 제작자이면서 동시에 원작 소설의 독자이므로 감독의 원작 해석이 또 다른 독자인 나의 감상과 같을 수 없다. 그 영화는 감독의 감상에 충실한 것이다. 시각화된 독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의 평가는 '적절성'에 바탕을 두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과연 감독의 영화를 통한 원작의 재해석이 원작의 소재, 인물 등과 적절하게 어우러지는가가 관건이다. 원작으로부터 너무 멀리 나간 재해석은 원작과의 괴리로 인한 불쾌감을 유발할 것이고, 원작에 너무 근접한 (재)해석은 새로울 것이 전혀 없고 영화를 통해서 찾을 수 있는 현재적인 의미도 전혀 없는 지루한 '답습'에 불과할 것이다.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은 원작의 한 장면을 적절히 재구성하면서 현대적인 의미를 억지로 주입하지 않았다. 원작 속의 인물과 사건을 적당히 가감하였을 뿐이다. 그리하여 낯설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를 통해 원작에 드러나 있는 생각 외에도 또 다른 생각―사실 이 생각과 감독의 생각이 일치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관객에게는 이러한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적벽대전>과 같이 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에 관객의 생각은 대체로 원작을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고 평가하려면 영화를 영화로 평가해야지 원작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조금 엉뚱하지만 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러 나갔더냐? 그렇다. …"(마태복음 11장 7-9절 중, 새번역성경) 무엇을 보러 영화관에 왔는가? 원작의 내용을 보러 왔느냐? 원작의 내용은 원작에 있다. 무엇을 보러 왔느냐? 영화를 보러 왔느냐? 그렇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영화만의 것을 보아야 한다. 새로운 생각을 찾아내는 관객의 능력이 영화의 재미를 결정한다.
<적벽대전>은 필자에게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영화였다. 현대화, 현실화하는 수준도 적절하여 전혀 거부감이 없었고 이런 지적인 즐거움까지 경험할 수 있게 하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오랜만에 재미 있게 잘 만든 중국 영화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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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이라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써 보았다. 고질적인 문제점, '용두사미'가 느껴진다. 개요를 안 써서 그런가?
이런 주제적인 측면 외에도 몇 가지 솔솔한 재미가 있다.
제갈공명과 주유의 금 2중주 장면. 종자기와 백아의 고사가 생각났다. 두 사람의 마음을 전달하기에 금만큼 적절한 선택이 또 있었을까?
전체적인 구도에서 생각해 보면 오행과 관련해서도 살펴 볼 수 있을 것 같다. 북방에서 온 조조 군은 검은색 군복을 입고 거북이(현무라 생각됨)가 깃발에 그려져 있다. 남방에 터를 둔 손권 군은 붉은 색 군복에 닭(주작이라 생각됨)이 그려진 군기를 갖고 있다. 또 유비 군은 흰색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는 각각 오행에 따른 색 배치가 아닌가! 더구나 남화 주작에 해당하는 손권 군이 북목 현무 조조 군을 불로써 물리치니 이 역시 오행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화극목이라고 남화 주작이 북목 현무를 물리치는 것은 어찌 보면 정해져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단한 문학가였다는 조조. 승리를 장담하면서 4언시를 읊었는데 그것은 무엇일까?
옛 동아시아 문화의 수사법의 한 측면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시를 알지 못하면 말을 못한다고 했던가? 대화 도중에도 수시로 시를 작성(?), 인용하고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함축적인 인용을 해버리는 언어생활을 볼 수 있었다.
미네르바의 추측성 발언 ― 사실 그의 오리지널 추측도 아니고, 수사 결과에 따르면, 여기 저기서 전문가 글을 참고했다고 하는 그 발언이 '국가신인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국가신인도란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특정 국가에 대한 투자의 위험도 또는 안전도를 의미한다. 다음은 네이버 사전 중 해당 항목의 발췌이다.
국가신인도란 투자대상국의 정치·경제·법령상의 문제로 일어날 수 있는 투자회수 불능의 가능성 곧 '국가위험'을 뜻한다.
전쟁·내란·폭동 등 정치적 변화나, 경제성장이나 국제수지 악화, 수출입의 규제, 정부나 공공기관의 고의적 채무불이행 등의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투자원리금의 상환불능 또는 상환연기의 위험이다.
이러한 국가신인도는 해당 국가 전체와 그 나라의 기업과 은행 신용도를 매기는 척도가 된다.
국가신인도가 곧 국가에 대한 신용인데 미네르바의 발언이 여기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구속 수사를 한다고 하니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나 보다. 그의 말 한 마디가 나라의 신뢰도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다니, 미네르바의 글 짜깁기 능력의 탁월함에 감탄하여야 할지, 그 정도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이 나라의 일천한 신뢰도에 대해 한탄해야 할지. 아니면 그것을 보고 국가신인도 평가에 영향을 받은 관련 조직의 연구원들을 탓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수많은 말이 오고 가는 인터넷에서 최근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부분에서 영향력 있는 발언을 했다고 붙잡아 수사를 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정부는 앞으로 인터넷 상에서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인가? 앞으로 이 자랑스런 국가에 불충하는 불순인자들을 잡아 내겠다는 것인가?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 누가 이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인가?
앞으로 인터넷 글쓰기는 '싸이월드'화 되어야 하겠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싸이월드와 같은 친목 도모의 공간의 글쓰기는 신변잡기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최근 보여주는 국가의 무서운 능력을 피해가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이고, 우리는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으려나?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